분야별 정보

목동리

가평군 북면 지역은 대부분이 높은 산과 깊은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가는 곳마다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 아름다워 , 사시사철 나들이 인파가 끊이지 않는 하늘이 준 천혜의 고장이다 . 예로부터 인걸은 지령이라 했듯이 화악산 ( 華岳山 1468m) 의 높은 기상의 맥이 동남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잠시 이곳에 기착하여 범바위 ( 虎岩 ) 를 수놓으니 , 많은 이들이 이르기를 이곳에서 훌륭한 인물이 출현할 것이라 하였다.

소법리

소법리란 소 ( 沼 ) 와 범 ( 범바위 ) 의 뜻으로 불러오던 것을 한문식으로 음 ( 音 ) 만을 따서 붙여 쳤다고 하며 , 손일이란 도투막이에 있는 투구봉 (667m) 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이 연이어 소 ( 沼 ) 를 이룬다는 뜻인데 소 ( 沼 ) 가 소 ( 蘇 ) 로 변해 소골 ( 蘇谷 ) 이라 적은 것이다.

화악리

화악리 ( 華岳里 ) 는 높은 산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인 경기도 최고봉 화악산 ( 華岳山 1568m) 아래 위치해 있다 . 이 화악산을 비롯한 촉대봉 , 몽덕산등 해발 1,000m 가 넘는 산이 즐비하고 , 계곡 깊숙히에는 지금도 천연림으로 둘러싸인 숲과 옥류가 줄기차게 흘러내린다 . 그러므로 예로부터 역사적인 인물들이 이곳을 찾아들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바 있다 . 멀리 1421 년 ( 世宗 3) 에는 한산이씨의 시조 목은 이색 ( 李穡 ) 의 손자인 이맹균이 사은사 ( 謝恩使 ) 로 중국에 다녀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시를 지어 찬양한바 있고 , 1676 년 ( 肅宗 3) 에는 우의정이던 허목 ( 許穆 ) 이 이곳에 찾아와 구름에 휩싸인 산야를 바라보며 무릎을 쳤다는 고사가 그가 지은 유산록 ( 遊山錄 )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도대리

도대리에는 자연부락이 토옥동 ( 兎王洞 ), 오목동 ( 梧木洞 ), 삼포평 ( 蔘浦坪 ), 익근리 ( 益根里 ), 얻암평 ( 立岩坪 ), 오동골 ( 梧洞谷 ), 관청리 ( 官廳里 ), 백자동 ( 柏子洞 ) 으로 나뉘어 있다 . 토옥동은 토끼뫼골의 한문식 이름인데 지금은 퇴골이라는 골짜기로만 그 이름이 남아 있고 , 이곳은 사람의 인가가 많다는 뜻으로 큰말 ( 大村 ) 이라는 이름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초등학교도 이곳 들녘에 있으므로 도대리에 본거지라 하고 싶다.

적목리

적목리 ( 赤木里 ) 는 본래 포천군 일동면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1895 년 관제개편에 의하여 가평군 북면으로 편입한 부락이다 . 예로부터 주목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적목 ( 붉을 적자 ) 이라 했다는데 현재 이 주목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지역은 화악산 · 중봉 · 석룡산 일대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이 적목리에는 자연부락이 거림천 ( 巨林川 ), 소락포 ( 小落浦 ), 논남기 ( 論南岐 ), 임산 ( 林山 ), 가림 ( 加林 ), 용소동 ( 龍沼洞 ), 조무동 ( 島舞洞 ), 도마치 ( 道馬峙 ) 등으로 분포되어 있다.

백둔리

북면 목동리에서 제구령뜰을 지나 다시 가둘기 모퉁이를 지나 돌아가면 , 좁은 협곡으로 둘려 흐르는 계곡의 물보라가 명승비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 손짓하고 , 구나무산 ( 塊木山 괴나무산 . 일명 참나무산 ) 허리를 비집어 세운 대원사 ( 大元寺 ) 는 하늘과 맞닿은 듯 고개를 반짝 들어야 겨우 바라보이는데 숲에 가린 산사 ( 山寺 ) 의 그윽한 풍경이 은은히 들려 오는 목탁소리와 어울려 잠시나마 인간의 번뇌 망상을 잊게 하는 대야 어쩌랴 !

제령리

북면 목동리에서 서쪽으로 목동초등학교를 지나 화악천을 건너면 , 북면 제 1 의 곡창지대로 이름난 제령리 ( 濟寧里 ) 가 시작된다 . 제령리란 말은 제구령리 ( 濟救寧里 ) 의 줄인 말이며 , 원래는 제구랑 ( 諸救糧 ) 으로서 이곳에서 생산되는 미곡 ( 米穀 ) 이 북면 지역 주민들의 양식이 되고도 남는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곡리

이곡리 ( 梨谷里 ) 는 가평읍 마장리에 소재한 속칭 노루목고개 넘어에 있는 마을로서 북면의 관문마을이다 . 북면의 모든 하천이 모여 이곳을 지나 흐르므로 전경이 매우 아름다우며 , 광활한 넓은 평지에서는 해마다 풍년을 기약하는 풍요로움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 이곡리는 배일과 가골 , 두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 주민의 수와 민가가 점차로 형성되어 나가니 , 배일 ( 바일 ) 은 안말 ( 內村 ) 과 등무터 ( 登武垈 ) 로 갈리고 , 가골은 석장리 ( 石長里 ) 로 변하였으나 ,1865 년 관제개편에 의하여 배일의 배는 배梨자로 가골의 골은 골谷자로 써서 梨谷里라 이름한 것이다.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최대 200Byte (한글100자) 이내 (현재 )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 총무팀
  • 연락처 : 031-580-4262
  • 수정일 : 2023.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