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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비주얼

변화와 활기가 넘치는 천혜의 환경 가평읍!

마을의 역사/유래

  • 가평읍연혁
    (가평의 지명과 유래에서 발췌)
    가평이라는 소지명은 이미 신라시대 (경덕왕 16년 서기 757년) 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원도 춘천시와 인접해 있고 춘천시로 통하는 관문이기도 하다.
    군청소재지 이자 가평군의 행정 중심지로서 향교(鄕校)와 경찰서·교육청·농협등의
    기관이 모두 가평읍에 소재한다.
    읍내에서 북으로는 옥녀봉(玉女峰)이 있고 , 동편에 명산 보납산(寶納山)이 수천년의
    역사를 지켜보며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 강가에 서있다.
    서기 1896년(고종 33년) 8월 정부의 관재개혁으로 邑中 부락과 內西面을 통폐합하여
    郡內面이라 이름 붙였으며 관할동리는 읍내리 , 대곡리 , 달전리 , 하색리 , 상색리 ,
    두밀리 , 경반리 , 마장리 , 승안리 , 개곡리 등 10개리 였다.
    그후 1938년 군내면이 가평면으로 개명되었다. 1942년 일제치하에서 청평의 수력발전소가
    완공됨에 따라 북한강 일대의 광활한 농경지가 수몰되면서 산유리(유동)를 중심으로
    6개리로 이루어졌던 남면이 폐지되고 남면에 소속되었던 6개리 중에
    이화리, 산유리, 복장리, 금대리는 가평면으로 편입되었고,
    고성리와 호명리는 외서면으로 개편하였다.
    1973년 7월 1일자로 가평면에서 가평읍으로 승격된 후 현재는 14개의 법정리와 31개의 행정리,
    33개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고, 총면적은 145.㎢이며 2만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 출처 : 가평의 지명과 유래
  • 읍내리
    가평군청 소재지이자 지방 행정의 중심지인 가평읍 읍내리(邑內里)는 예로부터 관좌(官座)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그 유래가 다양하다. 일찍이 고려말 풍수지리에 대가이던 정도전(鄭道傳) 이 가평에 이르러 이곳 지리가 영묘(靈妙)함을 보고 관좌의 터로 적합하다 이른 연유로 현(縣)터를 정했다고 한다.
  • 대곡리
    대곡(垈谷)이란 높은 언덕 , 또 는 둔덕이란 뜻이 내포된 곳이라는 말로서 안터골이 변해 안골로 불려 오며(역전뒤), 지금은 안말로 부르고 편안일자 일촌 ( 逸村 ) 으로도 기록해 옴을 볼 수 있다.
  • 달전리
    달전(達田)이란 '산이나 높은 곳 둘레에 있는 마을, 성읍 주변 마을'이며 밭이 많다 하여 밭전 字 인 '田'에, 댐이 건설되기 전 춘천(春川), 또 멀리는 원주(原州)와 왕래하였다 하여 이룰 달 字인 '達'을 결합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상색리
    빛고개란 높은 언덕을 빗겨 넘 는 고개라는 뜻으로서 이 고개가 대체로 비탈로 이루어지고 , 또 그 형상이 빗겨 있다는 뜻이다. 상색리 ( 上色里 ) 리란 빛고개 위 부락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 하색리
    하색리란 상색리 ( 上色里 ) 와 대칭되는 말로서 빛고개 아래 부락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 두밀리
    두밀리 ( 杜密里 ) 로 가는 길은 같은 개울 ( 하천 ) 을 열두번이나 벗고 건너야 하는 꼬불꼬불한 협곡을 이루고 있어 이곳을 십이탄 ( 十二灘 열두물결 ) 건너 부락이라 불렀다.
  • 경반리
    경반리라는 이름은 거울처럼 비쳐지는 반석이란 뜻인데 , 이곳에 있는 바위들의 모습이 대체적으로 넓적 넓적하며 또 이 부락의 진산인 수정봉도 문자 그대로 수정 ( 水晶 : 반짝반짝 빛나는 새끼치는 돌 ) 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거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성 싶다.
  • 승안리
    구한말까지만 해도 승안산 ( 升安山 )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왔으며 , 이는 이곳 고을 전체가 어찌 보면 산으로 연이어져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 마장리
    각 군현에는 군마 ( 軍馬 ) 를 합해 수백필씩의 말을 길렀으며 , 그 말들을 기르고 훈련시키는 장소를 마장 ( 馬場 ) 이라 불렀으니 서울에 마장동 ( 男場洞 ) 이 그것이고 , 가평의 마장리 ( 馬場里 ) 가 바로 그런 장소였다.
  • 개곡리
    개곡 ( 開谷 ) 이란 이름은 고을 ( 谷 ) 이 열린다 ( 開 ) 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데 , 이곳으로 흐르는 계곡의 모습이 마치 수만의 대군 ( 大軍 ) 을 이끈 장수가 좁은 협곡을 빠져나가 망망대해 ( 도시 ) 로 들어간다는 형국의 지형이라고 한다.
  • 이화리
    조선조 영조 시절까지만 해도 이화리는 영골 ( 永洞 ) 로 기록되었는데 그 이름이 격에 맞지 않는다 하여 배곶이의 배자를 배이 ( 梨 ) 자로 하고 곶을 꽃화 ( 花 ) 로 써서 이화리라는 순한문식으로 작명한 것이라 그때부터 이화리라는 이름으로 불려 온다.
  • 산유리
    산유리는 본디 산유동 ( 山踰洞 ) 과 버들골 ( 柳洞 ) 로 나뉘어 있었는데 1942 년 관제개편당시 산유동 ( 山踰洞 ) 의 산 ( 山 ) 자와 유동 ( 柳同 ) 의 류 ( 柳 ) 자를 따서 산유리 ( 山柳里 ) 라 이름한 것이다.
  • 복장리
    복장포부락은 현재 복장포초등학교가 있는 곳의 소지명으로 복골 ( 福谷 ) 이라 부르고 , 긴복골 ( 長福谷 ) 또는 장복포 ( 長福浦 ) 라 하여 이곳의 하천이 북한강으로 유입될 때 포구 ( 浦口 ) 를 이루어 그 모습을 나타낸 이름일 것이라는 설이 그럴듯하다
  • 금대리
    금대 ( 金垈 ) 라는 말은 쇠터의 한문식 이름이다. 이 지역은 청평댐을 막기 이전까지만 해도 사금 ( 沙金 ) 이 많이 채취되었는데 아마도 쇠터란 이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