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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비주얼

산이 높고 물이 맑은 아름답고 깨끗한 북면!

마을의 역사/유래

  • 북면연혁
    가평군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 면으로서 동으로는 강원도 춘천시에 인접해있고 북으로는 화천군과 서쪽으로는 포천군에 경계를 이루고 있는 심산 중령의 산악지대이다. 본래 북면은 조선말엽까지 상북면 , 하북면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 상북면사무소는 현 도대리 관청부락에 있었고 ( 후에 제령리로 사무소를 이전함 ) 하북면의 소재지는 죽둔리에 있었다. 관할 동으로는 상북이 제형리 , 도대리 , 백둔리였고 , 하북은 죽둔리 , 상목동 , 소복동 , 이목동 , 이곡리 , 소법리 , 화악리였다. 그후 1896 년 관제개혁으로 인하여 상북 , 하북면을 통합하여 북면으로 개칭함과 아울러 그때 까지 포천군에 예속되어 있던 역목리 , 용소동 , 주무동 , 논남기 , 임산등이 북면으로 편입되었다. 규장각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가평읍지에 의하면 1871 년 현재 북면에는 8 개동 즉 이곡리 , 상목동 , 화악리 , 소법리 , 제구령리 , 도대리 , 백둔리 전체호수가 451 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높은 산 깊은 계곡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북면지방에는 타지역에서 볼 수 없는 명승비경이 즐비하다.
    해발 1,267m 인 명지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이라던가 적목리 도마천에서 장장 30 여 km 나 흘러 내리는 계곡에는 크고 작은 폭포들이 즐비하다. 용소목에 용소는 용이 놀고 있는 형국이고 , 도마치에 무주치폭포 , 소락동에 소락폭포 , 임산부락에 삼단폭포등은 아직까지 사람들의 왕래가 드물어 태고의 신비와 감정을 맛보게 하는데 충분하다. 모든 계곡이 바위로 되어 있어서 더욱 장관이기도 하지만 한마디로 물이 흐른다기 보다는 구슬이 굴러 내린다고 보는게 타당한 말인지도 모른다. 문화유적으로는 적목리 논남부락에 효자 강영천 의 효자정문이 있는데 이 정문은 조선숙종 27 년 ( 서기 1700 년 ) 에 하사받은 내용의 현판이 있으며 , 현재의 건물은 1806 년 ( 순조 6 년 ) 12 월 12 일 이오성목수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다. 백둔리 죽터에는 비석바탕의 망두석이 이곳의 수호신이 되어 있고 , 소법리 이봉골에는 충남 진잠현감을 지낸바 있는 구하주 ( 후에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직됨 ) 의 묘가 있고 , 소법리에는 전주류씨로 가평군 하면에서 출생하여 별시문과에 급제한후 장령 , 필선등을 역임하고 동부승지가 된 유준창 (1601~1670) 의 묘도 있다. 그밖에 애국지사 최종화 , 정흥교 , 이영현 , 장호리의 묘도 모두 북면에 있다. 산이 높고 물이 맑아 주민들의 기상이 뛰어나고 , 나라를 생각하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배출지이기도 한 북면은 문자 그대로 충성의 고장이다. 1896 년 을미 의병운동 당시에는 가평의 의병들이 이곳에 주둔해 있었고 , 동료들을 구하고자 단신으로 대항했던 의병장 정문위의 출신지가 또한 이곳이며 3.1 만세 운동의 시발지가 목동리 멱골. 싸리재인점만 보아도 북면의 기상을 짐작키 어렵지 않다.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중학교 1, 초등학교 2 개교가 있으며 , 법정리수가 8 개 , 행정리수 13 개에 자연부락이 18 개이고 총인구 4,033 명이 거주한다.
  • 목동리
    가평군 북면 지역은 대부분이 높은 산과 깊은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가는 곳마다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 아름다워 , 사시사철 나들이 인파가 끊이지 않는 하늘이 준 천혜의 고장이다. 예로부터 인걸은 지령이라 했듯이 화악산 ( 華岳山 1468m) 의 높은 기상의 맥이 동남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잠시 이곳에 기착하여 범바위 ( 虎岩 ) 를 수놓으니 , 많은 이들이 이르기를 이곳에서 훌륭한 인물이 출현할 것이라 하였다.
  • 소법리
    소법리란 소 ( 沼 ) 와 범 ( 범바위 ) 의 뜻으로 불러오던 것을 한문식으로 음 ( 音 ) 만을 따서 붙여 쳤다고 하며 , 손일이란 도투막이에 있는 투구봉 (667m) 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이 연이어 소 ( 沼 ) 를 이룬다는 뜻인데 소 ( 沼 ) 가 소 ( 蘇 ) 로 변해 소골 ( 蘇谷 ) 이라 적은 것이다.
  • 화악리
    화악리 ( 華岳里 ) 는 높은 산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인 경기도 최고봉 화악산 ( 華岳山 1,468m) 아래 위치해 있다. 이 화악산을 비롯한 촉대봉 , 몽덕산등 해발 1,000m 가 넘는 산이 즐비하고 , 계곡 깊숙히에는 지금도 천연림으로 둘러싸인 숲과 옥류가 줄기차게 흘러내린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역사적인 인물들이 이곳을 찾아들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바 있다. 멀리 1421 년 ( 世宗 3) 에는 한산이씨의 시조 목은 이색 ( 李穡 ) 의 손자인 이맹균이 사은사 ( 謝恩使 ) 로 중국에 다녀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시를 지어 찬양한바 있고 , 1676 년 ( 肅宗 3) 에는 우의정이던 허목 ( 許穆 ) 이 이곳에 찾아와 구름에 휩싸인 산야를 바라보며 무릎을 쳤다는 고사가 그가 지은 유산록 ( 遊山錄 )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도대리
    도대리에는 자연부락이 토옥동 ( 兎王洞 ), 오목동 ( 梧木洞 ), 삼포평 ( 蔘浦坪 ), 익근리 ( 益根里 ), 얻암평 ( 立岩坪 ), 오동골 ( 梧洞谷 ), 관청리 ( 官廳里 ), 백자동 ( 柏子洞 ) 으로 나뉘어 있다. 토옥동은 토끼뫼골의 한문식 이름인데 지금은 퇴골이라는 골짜기로만 그 이름이 남아 있고 , 이곳은 사람의 인가가 많다는 뜻으로 큰말 ( 大村 ) 이라는 이름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초등학교도 이곳 들녘에 있으므로 도대리에 본거지라 하고 싶다.
  • 적목리
    적목리 ( 赤木里 ) 는 본래 포천군 일동면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1895 년 관제개편에 의하여 가평군 북면으로 편입한 부락이다. 예로부터 주목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적목 ( 붉을 적자 ) 이라 했다는데 현재 이 주목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지역은 화악산 · 중봉 · 석룡산 일대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적목리에는 자연부락이 거림천 ( 巨林川 ), 소락포 ( 小落浦 ), 논남기 ( 論南岐 ), 임산 ( 林山 ), 가림 ( 加林 ), 용소동 ( 龍沼洞 ), 조무동 ( 島舞洞 ), 도마치 ( 道馬峙 ) 등으로 분포되어 있다.
  • 백둔리
    북면 목동리에서 제구령뜰을 지나 다시 가둘기 모퉁이를 지나 돌아가면 , 좁은 협곡으로 둘려 흐르는 계곡의 물보라가 명승비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 손짓하고 , 구나무산 ( 塊木山 괴나무산. 일명 참나무산 ) 허리를 비집어 세운 대원사 ( 大元寺 ) 는 하늘과 맞닿은 듯 고개를 반짝 들어야 겨우 바라보이는데 숲에 가린 산사 ( 山寺 ) 의 그윽한 풍경이 은은히 들려 오는 목탁소리와 어울려 잠시나마 인간의 번뇌 망상을 잊게 하는 대야 어쩌랴 !
  • 제령리
    북면 목동리에서 서쪽으로 목동초등학교를 지나 화악천을 건너면 , 북면 제 1 의 곡창지대로 이름난 제령리 ( 濟寧里 ) 가 시작된다. 제령리란 말은 제구령리 ( 濟救寧里 ) 의 줄인 말이며 , 원래는 제구랑 ( 諸救糧 ) 으로서 이곳에서 생산되는 미곡 ( 米穀 ) 이 북면 지역 주민들의 양식이 되고도 남는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 이곡리
    이곡리 ( 梨谷里 ) 는 가평읍 마장리에 소재한 속칭 노루목고개 넘어에 있는 마을로서 북면의 관문마을이다. 북면의 모든 하천이 모여 이곳을 지나 흐르므로 전경이 매우 아름다우며 , 광활한 넓은 평지에서는 해마다 풍년을 기약하는 풍요로움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이곡리는 배일과 가골 , 두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 주민의 수와 민가가 점차로 형성되어 나가니 , 배일 ( 바일 ) 은 안말 ( 內村 ) 과 등무터 ( 登武垈 ) 로 갈리고 , 가골은 석장리 ( 石長 里 ) 로 변하였으나 ,1865 년 관제개편에 의하여 배일의 배는 배梨자로 가골의 골은 골谷자로 써서 梨谷里라 이름한 것이다.